비록 대통령 임기 한 번으로 끝났지만 퇴임후에 훨씬 더 존경받는 대통령의 롤 모델로 자리잡은 지미 카터 대통령 오늘은 지미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음악]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지은입니다 지미카터 대통령이 10월 1일 생일을 맞았다고 하는데요 무려 100세 생일을 맞았다고 합니다 일단 축하를 드리고요 물론 요새는 건강이 좀 안 좋아져 최근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습니다 뭐 그렇지만 어쨌든 미국 대통령 중에 가장 장수한 대통령으로 역사의 이름을 남기게 됐습니다 사실 우리가 카터 대통령하면 뭔가 이렇게 평화를 위해서 굉장히 헌신을 하고 활동을 많이 한 전직 대통령이다 알려져 있죠 그래서 오늘은 지미카터 대통령에 대해서 한번 알려 보려고 하는데요 지미카터 대통령 조지아주의 플레이스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는데요 아버지는 땅콩 농장을 경영하는 땅콩농장 주 였고요 어머니는 간호사였다 하죠 한때는 조지아 택을 다니다가 해군사관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요 그리고 졸업 후에는 잠수함 승무원으로 태평양 함대 그리고 대서양 함대에서 복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대위로 예편을 하고 조지아 주로 돌아와서 가족의 땅콩 농장을 경영을 했죠 그 이후에 땅콩 농장이 상당히 승승 장고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상당한 불을 일구었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정개 발을 을 드리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지역 교육위원회 시작을 해서 1962년 조지아 주의 주의회 상원 의원으로 당선이 되고요 1966년에는 조지아주 주지사에 출마를 합니다 근데 아깝게 여기서 낙선을 하고 그리고 1970년 재도전을 해서 이번에는 당선이 되죠 그런데
카터 대통령이 당시의 주지사에 취임을 하면서 굉장히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종 차별의 시대는 끝났다 뭐 지금 들으면은 이게 뭐 이렇게 대단한 말인가 아쉽기는 하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여전히 민권 운동이 있을 때였고 또 조지아는 남부 주였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죠 그리고 사실 지미카터 대통령이 그 전에는 분리 대대 차별하지 않는다 seate but equal이 원칙을 좀 지지했었다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주지사에 취임을 하면서 태도를 바꾼 거죠 만약에 치유하기 전에이 얘기를 했으면 당선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주지사가 되고 난 후에 조지아주 두 정부를 개편도 하고 예선도 절감을 하면서 굉장히 효율적이고 또 투명하게이 정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았었고 굿 거먼 뉴스라는 제목을 단 타임지 커버에 소개가 되면서 전국적으로 조금이나마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죠 그러면서 197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 1974년에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루키 주지사가 대통령 선거에 나오게 된 이후에는 조금 그 그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1974년 하면은 워터게이트 스캔달 인해서 닉슨 전 대통령이 하해를 하던 시점이었죠 미국 국민들이 당시에 비대해진 행정부의 권력이라는 또 연방 의회의 뭐 부정 부패라는 이런 것들의 신물이 나고 그리고 굉장히 불신이 심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청렴하고 깨끗한 땅콩 농장주 출신의 주지사 그러니까 뭔가 좀 신선하게 어필을 했었던 것이죠 결국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된 카터 대통령 1976년 선거를 치르게 되는데요
닉슨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또 닉슨 대통령이 하야를 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게 된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결전을 치르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포드 대통령에 대해서는 거리 음식 영상에서 한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요 당시 멕시코의 전통 음식인 타말레 제대로 먹을 줄 몰라서 망신을 당하고 그걸로 인해서 사실상 표를 많이 빼앗겼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하죠 그리고 사실 포드 대통령의 실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데요 TV 토론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하에 있지 않다라는 발언을 한 겁니다 자 이게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있거든요 그니까 그 이야기를들은 사람들이 아니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닉슨 하야하고 부통령 자리에서 어부지리 럼 올라와서 대통령이 되더니 아 정말 아는 거 하나도
없구나 뭐 이런 안 좋은 이미지를 주는 바람에 졌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카터가 포드를 를 168만 표 아주 작은 표 차이로 승리를 하면서 대통령 직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일단 신선하고 또 워싱턴 DC 그 정치 하고는 거리가 있다라고 해 당선을 시켜 놨는데 재임 기간 내내 인기가 그렇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처음에 시작은 좋았어요 취임 당시의 지지율은 66% 그리고 정말 많이 올라갔을 때에는 70%지 올라가기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계속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마지막에 퇴임할 당시는 30% % 정도 때 그러니까 굉장히 우울한 재임 기간을 보냈다고 할 수가 있죠 이렇게 카터의 인기가 계속해서 떨어진 데는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당선은 되었지만
워싱턴 DC 정치 하고는 굉장히 동떨어진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좋은 관계라든지 인맥을 갖지 못했다라는 것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방 의하고 좋은 관계를 갖지 못했어요 그 당시의 연방 의회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있는데 자신의 소속 정당임도 불구하고이 의원들고 그렇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본인이 야심차게 밀어 붙이려고 했었던 개혁안도 의회에 의해서 계속 좌초가 되고 워싱턴의 세력이 있다든지 정치적 자산이 있는게 아니다 보니까 직접적으로 국민들한테 호소하는 일들이 많아졌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뭐 국민들은 아 우리 대통령이 하는 일이니까 밀어 줘야지라고 얘기를 하면 또 의외에 있는 의원들은 아 포퓰리스트 우리들하고 어떤이 이야기나 타협을 하려고 하지 않고 국민들한테 직접 가서
호소를 한다라고 해서 사이는 점점점 틀어져 갔던 거죠 그렇게 카터의 개혁안은 사실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 대중들은 빨리 열광도 하지만 빨리 씻기도 하잖아요 아니 우리가 뽑아주고 그리고 힘도 실어 줬는데 왜 저렇게 하겠다고 했던 개혁들을 하나도 못 하는 거야 라면서 불만이 점점 쌓여져 가고 그러면서 카터 전 대통령의 인기도 낮아지게 된 거죠 설상 가상으로 념이라는 원칙 주의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당선이 됐는데 주변 스텝이나 혹은 동생의 스캔달 그도 굉장히 괴롭히는 요인이 됐었고요 사실 따지고 보면 카터 대통령이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성과를 낸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77년 파나마 운하 조약을 통해서 미국이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을 갖게 하는데도 일조를 했고요 그리고
1978년에는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그리고 백인 이스라엘 총리가 캠프 데이빗에 모여서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기도 했었죠 그리고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 있던 브레즈네프 양자 전략 무기 제한 조약을 맺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동에서 얘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서 카터 대통령 인기는 더욱더 추락하게 됐습니다 바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었고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을 하고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지고 그리고 팔레비 국왕이 축출을 되면서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무장 세력이 테란 주제 미국 대사관을 습격을 해서 미국 시민 66명을 납치를 하고 그중에 52명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억류하는 일이 있었죠이 사건은 사실 지미카터 대통령이 이란의 팔레비 국왕을 미국 입국을
허용을 한지 2주 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실 미국은 이란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을 때 처음부터 악연은 아니었어요 뭔가 서로간에 좀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방식이었 데요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상황을 안 좋게 만든 것이 바로 팔레비 입국을 허용하면서 터였어 지미카터 대통령은 팔레비 국왕의 입국을 처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팔레비 절친이라고 할 수 있는 락펠러 그리고 키신저가 아주 강하게 압박을 하면서 밀어붙였다고 하죠 그러면서이란 내에서 아주 걷잡을 수 없게 반미 감정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이렇게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워낙에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국제 뉴스로 거 일 매일 방영이 됐고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아니 저렇게 미국인들이 잡혀 있는데 우리 대통령은 뭐라는
것이냐라는 비판이 계속 쏟아지게 됐죠 그래서 결국 1980년 4월에는이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한 특수 작전을 시행을 합니다 이름하여 오퍼레이션 이글 클럽 그런데 이게 시작도 하기 전에 헬리콥터와 비행기가 추락을 하면서 완전히 대실패로 끝나 버려요 이렇게 중동 상황이 혼탁해지면 유가가 오르게 되죠 거기에 더불어서 1980년 말에는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하면서 더욱더 유가는 요동치게 됩니다 당연히 경제는 안 좋아지게 되죠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1976년에는 6%였던 것이 1980년에는 12% 급상승하게 되죠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다 바로 경제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카터 전 대통령에게는 재선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 되어 버렸죠 결국 재선의 한 카터 대통령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조금 조용하게 보냈는데요 돌아가 봤더니 신탁을
맡겼던 땅콩 농장 경영도 제대로 잘 안 되어서 빚더미에지게 되고 그래서 굉장히 열심히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랜트 책을 그렇게 많이 썼어 돈 벌려고 그러면서도 여러 분쟁 국가들을 방문을 하면서 평화의 전도사 역할을 많이 했었고요 뭐 파나마든지 에티오피아 이런 국가들의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서 노력을 했고 또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청 1994년에는 핵개발과 관련해서 북한을 방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공로로 인해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카터 대통령이 본이 아니게 만들어낸 선거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옥토버 서프라이즈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11월 초에 있죠 그러다 보니까 10월에 뭔가 게임 체인저가 될 만한 굉장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데요 사실이 말이 나온 것이 당시 카터 대통령 그리고 레이건 대통령이 격도 했었던 1980년 선거였습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후보의 캠프의 선거 전략가였다 그 나중에 CIA 국장이 되는 윌리엄 kcga 만들어낸 말이다 하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1980년에 굉장히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가이란 인질 억류 사건이었죠 그래서 레이건 캠프 측에서는 아 지금 미국 행정부에서이란 측하게 11월 선거 바로 직전 10월에 인질들을 석방한다 뉴스가 나오면 어떡하나 전전긍긍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있으면 어떡하나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바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옥토버 서프라이즈 joh 그런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죠 그리고 사실은 억류되어 있었던 인질들이 석방이 된 것은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석방이 됐습니다 그니까 이쯤 되면은 사실은 카 행 정부하 이란의 정부가 뭔가 협상을 했던 것이 아니라 레이건 측에서이란 정부와 협상을 해서 우리가 선거에서이고 취임을 할 때까지이 인질들을 억류에 달라라고 했던 것이 아니냐라는 뭔가 느낌적 느낌이 들기도 하죠 포드 행정부 그리고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 안부 보좌관을 지냈었던 게리식이 이런 말을 많이 했었는데요 글쎄요 그냥 의심이다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있었던 이한 콘트라 사건을 본다면 과연 의심만 할 뿐인가 생각도 들긴 합니다네 백세 생일을 맞았지만 지금 병석에 있다라고 들었는데요 죄임 기간에는 그렇게 인기가 있었던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퇴임을 하고 난 후에 행보는 많은 대통령들의 귀감이 되고 또 롤
모델이 되고 있다고 하죠 퇴임 후에 대통령상을 만드는데 그 누구보다도 공원을 한 지미카터 대통령 백세 생일을 축하하면서 오늘 지미카터 대통령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n [음악]